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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요약본)
비경을 넘어
“동양의 산수화는 서양의 풍경화와 달리 ‘마음속의 산수’를 그리기 때문에 객관적인 자연의 재현再現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실경實景을 그렸다 하더라도 시각적인 사실 묘사가 아니라 경치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래서 산수화에서는 평범한 경치가 아닌 비경祕景이 많이 보인다.” 조용진·배재영의 『동양화란 어떤 그림인가』에 기술된 대목으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내용이다. 산수 기반의 비중이 많은 동양화에서 자연은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의중意中을 건드려 어떤 비범한 풍경으로 거듭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예찬적 태도의 시각화가 많고, 여기서의 자연도 풍경 기반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동양화는 더 많은 것을 대상으로 하거나 차용하며, 동양화 기반이면서도 ‘당대의 미술contmporary art’로서의 의미를 찾는 작업들로 분화 및 확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장영은은 자연의 풍경적 속성이나 그에 대한 예찬적 태도로부터 벗어나 자연自然의 본래 뜻인 ‘스스로 그러하다’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찍이 깨달은 바를 자신만의 화폭으로 옮기는 젊은 작가이다. 또한 누구라도 보면 장영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얄팍하게 따라 할 수조차 없는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이번 삼세영에서의 대규모 개인전에 대한 자격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다시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전시는 작가의 연대기적 작업에 대한 발표나 회고 성격이 아닌, 그 스펙트럼을 파노라믹하게 보여주며 작업과 공간이 주는 조화로움에도 드나들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따라서 꼭 이 글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관람객들 역시 자신만의 감상으로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다.
이번 전시의 영문 타이틀인 ‘ANTHOLOGY’와 한글 제목 ‘삶의 조각’은 서로가 직역 관계라기보다는 하나의 논리 구조를 이루고 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앤솔로지’는 시 모음집이라는 의미로, 어원은 그리스어의 앤톨로기아anthologia로 ‘꽃을 따서 모은 것’이라는 뜻이다. 장영은은 “떨어진 낙엽과 수피樹皮, 상처와 구멍이 난 잎,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 등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소재들과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살아내는 자연을 통해,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를 역설하고자 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계절을 단순히 찬미하거나 흐름에 의한 피상적 변화를 담아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 낱낱의 개체들을 긴 시간 관조함으로써 각자의 방식과 속도로 각자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작가는 노트 말미에 “부단히 일궈온 것들을 모두 내려놓는 용기와,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니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이 내게 시詩’로 다가왔다.”고 적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처음 시도되는 설치 작업을 먼저 소개하자면, 흙을 연상시키는 나무껍질bark의 자연성 기반 위에 상처 입은 비정형의 이파리들이 은색실 자수로 표현되었고, 그 위로 평소 읽던 시집들을 놓음으로써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작가가 실제로 수집한 잎들을 스텐실 기법으로 직접 찍어서 본을 뜨고 오려내는 수고로움과 디스플레이 연출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이파리처럼 벌레를 먹고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소멸해가며 결국 죽는, 유한한 운명이지만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흙으로 스며들고 다시 태어남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전시에 힘을 더하는 것이다. 반원 거울 위에 수직으로 세운 120호 크기의 이파리 작업 3점은 “소멸이라는 자연의 모습과 순리가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도 같기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관람객의 심상이 궁금하다”는 장영은 작가. ‘ANTHOLOGY’ 연작에서도 2022년부터는 이를 비, 하늘과 구름, 눈 오는 풍경, 이슬, 물결, 윤슬 등 다양한 자연의 모습들을 디테일한 감성과 자신만의 화풍으로 잡아낸 것은 이른바 투영投影과 반영反映에 대한 고민과 배려의 결과일 터이다. 자연을 끌어오는 것은 감상과 찬미를 넘어선 새로운 이미지로서의 창조임을, 그의 작업들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처럼 영감의 대상 발견하고 유심히 관찰, 수집하며 작업으로 어떻게 풀어낼지 상상한 뒤 결국 구현한다는 장영은의 성실하고 치열한 예술가로서의 삶이 이곳 삼세영 공간 전반에 녹아있다. ‘ANTHOLOGY’는 2021년에 시작한 연작으로, 각각 2019년부터 작업해온 ‘Eternally Blue : 영원히 푸르다’, ‘Undried Fragrance : 마르지 않는 향기’ 시리즈와 함께 이번 전시에 선보이게 된다. 먼저 ‘Eternally Blue’는 ‘푸른 수묵’을 하는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화단에 알리며 버드나무의 의연함을 동경함과 동시에, 그 역시 계절의 흐름에 따라 모든 잎이 떨어질 것을 알지만 푸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했던 마음을 담은 작업이다. 자연의 빛과 결에 대한 작가의 집념이 전통과 현대를 잇는 새로운 시도와 연구를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푸른 수묵화로 발현되었으며, 이후 작업의 내적, 외적 성장에 자양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Undried Fragrance’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중유물번호 창덕6552인 양기훈의 ‘매화도자수병풍’梅花圖刺繡屛風을 재해석한 것으로, 그가 작품을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 전시에서 실제로 본 이후 시도한 회심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기존의 대형 걸작을 자신의 방식으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시도는 분명한 소신과 실력을 요하기에 그 자체로도 엄청난 용기라고 할 수 있는데, 장영은은 병풍의 크기를 존중하되 이를 100호 세 점으로 재편하고 구도도 약간 옮기면서까지 ‘월매도’로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특기이자 특징인 수묵으로 그리고 바느질을 중첩해 운율감을 더했다. 특히 수묵 밑그림을 제작, 자수작업은 궁중의 자수장들이 진행한 양기훈의 작업 과정과 달리, 직접 묵으로 그리고 운율감을 더하는 바느질까지 모두 긴 호흡으로 직접 작업하는 장영은에게 있어 후대의 작업이란 계승 자체보다는 발전이 더 중요함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주제 면에서도 양기훈의 작품이 강인한 지조를 강조한 것이라면, 장영은은 “풍요로움의 상징인 둥근 보름달 아래, 매화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은은히 퍼져나가는 계절의 생동감을 영원토록 화폭에 담았다.”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아가 “궁중회화인 자수매화도와 달리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제 작업은 공공성을 띤다는 점에서 대형작품의 작업량을 매해 꼭 계획, 작업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포부도 밝혔다.
이처럼 수묵으로 표현한 이미지와 이를 감싸고 있는 여백으로 표현한 빛, 반짝이는 은실의 자수등 기법 면에서도 주목받아온 장영은의 작업에서는 바느질, 그러니까 수묵화위에 중첩된 땀의 미학도 빼놓을 수 없다. 장영은은 이전의 전시들에서도 조명과 각도,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땀의 밝기와 디테일을 보는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장식적 측면이 아닌 동양회화의 평면적 한계를 깨는 운율감과 본능적인 감각으로써 딱 필요한 만큼에 발현된 자연의 결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항상 눈길을 끌었다. 이 젊은 동양화 기반의 화가에겐 어떤 특별함이 있을까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차경借景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본래 전통 정원 조성의 경관 기법 중 하나로 ‘정원 밖의 주변 경관을 내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울타리 내부 경관과 정원 밖의 합치된 경관을 만들어냄’을 말하는 것이지만, 장영은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의식의 회화’라는 정원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로 인해 감상자는 자연의 실경과 비경에 압도되기보다는 작가의 파노라마적 세계에 드나들며 우리의 현재 모습과 마음을 반추하거나 대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보는 자연은 시각적 경탄의 대상이자 그 대규모성이 압도하는 힘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기 때문에 관망의 대상인 경우가 많은데, 작가의 눈에는 오히려 초라해지고 하강하는 기운, 사라져가는 개개인처럼 흩어지는 풍경으로 다가옴으로써 그것이 갖는 ‘역설적인 에너지’로서 재해석되는 경치가 보였던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장영은은 “아름답다고 보기 어려운”이라고 그 동기를 말하고 있지만, 감상자의 눈에 그 결과물은 어느 가사처럼 슬프도록 아름답기도 하고, 처연하게 빛나기도 한다. 가령 영화에 예를 들어보자. 자연에 대한 환상성을 목표로 한다면 CG를 활용한 비경의 재현과 아이맥스 같은 초대형 화면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본질을 깊이 통찰을 한다면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거나 애당초 생각하지 않고 좀 더 관찰하고 철학적인 눈으로 재현하는 화면을 만들 것이다. 장영은은 이러한 현실적 시각 기반의 문예가적 태도로 작업을 해왔고, 그러면서도 작가의 책임감과 지속성을 인식, “앞으로 부지런히 1년에 100호 열 점씩 5년간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대작 오륙십 점의 작업을 쌓는 것이 목표”라며, 자신만의 파노라마적 세계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놓았다. 이는 훗날 작가의 연대기적 커리어 뿐만 아니라 작업의 스펙트럼에 감상자와 컬렉터가 드나들 수 있는 정원, 그야말로 비경을 넘어 차경이 있는 ‘예술적 사유의 너른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작가가 산수화 중심의 동양화 전통적 관점에만 얽매였거나, 현대화를 위해 채색화로의 전환을 택했다면 자신의 주제와 기법을 확정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반대로 산수화와 문인화, 사군자화를 종횡하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세우고, 채색화가 아닌 수묵화를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문두에 인용한 『동양화란 어떤 그림인가』에서도 “먹물로만 그리는 그림뿐 아니라 수묵에 담채, 수묵에 농채한 그림이라도 먹이나 색이 스며들고 번지는 효과를 이용해 수묵화의 스타일을 쓰는 것이 채색화와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장영은이 수묵 사군자 매난국죽梅蘭菊竹을 선보이게 된 것 역시 기존의 관점을 계승했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재해석으로써 자신의 화풍과 주제를 당당하게 펼쳐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볼 때 장영은이 2019년부터 작업해온 ‘Eternally Blue : 영원히 푸르다’ 시리즈로 다시 돌아가보면, 이 역시 음양오행설에서 동쪽과 봄을 나타내는 푸른색이라고 좁게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산과, 바다, 하늘 등 자연을 함축한 색으로 넓게 정의함으로써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해석보다는 시간과 공간의 영원성에 대해 보편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감각의 정원을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장영은은 그러한 대의大義 아래 자연, 혹은 영원함과 유한함의 섭리에 대해, 마치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나오지 않으면 몇 번이고 작업을 이어나감으로써 기다림과 고행을 감수하고, 수묵 특유의 번짐을 고려해 명철하게 그려내며, 처연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미장센을 고려하며 상처난 자연, 우리네 인생을 화폭에 옮겼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안의 소멸이 가진 따뜻한 하강, 녹으면서 동시에 소생하는 우리 각각의 생명감을 마치 시선Anthology처럼 모아 놓은 ‘삶의 조각’들로 마주하며 각자의 시간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마침 계절이 겨울이고, 해를 넘어가는 연말이기에 전시 시기로서도 적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역설적으로는 작가가 봄의 소생을 기다리고 녹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서의 생명력을 ‘언제나 그리고 있음’을, 작업실적 관점에서도 감상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글/ 배민영(예술평론가)'ARTIC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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