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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가, 추사 '세한도'를 21세기에 재창조?
수묵(水墨)은 물과 먹이다. 물 먹은 먹이고, 먹이 든 물이다. 물은 먹빛을 실어나르는 매개이다. 먹빛을 실어나른 뒤 물은 사라진다. 물기는 사라지지만 물의 마음(水心)은 먹의 질감과 물성(物性)에 애틋하게 남아있다. 수묵화는 먹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사실은 물을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스며드는 물, 번지는 물, 고이는 물, 퍼지는 물, 젖어가는 물, 말라가는 물.
수묵은 물의 생명을 드러내는 안료다. 수묵화는 원래 '그림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달빛 환한 지창(紙窓)에 하늘거리는 매화 그림자는, 매화보다 아름답다. 매화는 빛 아래에서 오롯이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매화 그림자는 그 빛을 죽여 그 형상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심상(心像)을 만든다. 옛사람들은 저 매화 그림자에 혹(惑)하였다. 그 간절한 욕망을 다급한 마음의 붓질로 담은 것이 묵매(墨梅)다. 최고의 미색(美色)이 검은 색인 까닭은, 그 안에 모든 빛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빛깔은 먹색과 잘 어울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22년 때이른 열대야가 찾아온 6월의 끝자락에, 놀라운 겨울 수묵을 만났다. 추사 김정희가 여름날 푹푹 찌는 방안에서 온몸을 떨며 그려냈던 세한도처럼, 서늘한 현기증이 있었다. 서른 살이라 믿기지 않는 감수성이 빚어올린 옥색 수묵은 5천년 '그림자 그림'의 반란이랄까, 아니 뜻밖의 외출이랄까. 매혹적인 빛으로, 죽음과 적막으로 정화(淨化)된 겨울을 소환하고 있었다. 청색의 어디쯤, 녹색의 어디쯤에 찰나의 빛으로 얼어붙었던 옥빛이, 이렇게 시원하고 고운 빛이었다니. 장영은은 문득, 시간의 푸른 액자 속으로 나를 데려갔다.
옥빛 수묵은 어디든 배어들었다. 하늘과 풍경과 수면 위에, 저를 고집하지 않고 많은 것을 여백으로 내주고 있었다. 심연(深淵)이라 부르는 영원한 물에 닿은 그 빛은, 빗줄기를 실감나게 하고 구름을 고즈넉하게 했다. 형상은 어쩌면, 저 흐릿하고 애매하고 모호한 것들이 우연히 뭉친 존재인지도 모른다.
밤하늘이 수묵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일편월(一片月)이 수묵이 되는 까닭은, 그 어둠이나 그 희부윰함에 기대지 않고, 바느질로 한땀 한땀 누빈 별이라든가 달빛 알갱이 같은 이채로운 오브제가 수묵의 단조로움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이 나뭇잎은 겨울날 어느 얼음 위에 떨어진 고엽(枯葉)이었을지 모른다. 봄여름가을 동안 무성한 삶을 지킨 가장 우렁찬 생명이었으리라. 그는 겨울의 삼엄한 명령을 받았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떨어져라. 칼바람 한 올이 불어왔고 그는 서슴없이 낙엽이 되었다. 벌레들이 구멍을 내고 바람이 움켜쥐었던 결을 찢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준 그를 보며, 작가는 질문한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그야 말로 옥빛 정결의 완성을 이룬 겨울의 성자가 아닌가. 수만년 시간을 딛고 나온 화석처럼 도도하게, 푸른 잎은 몸을 살짝 비튼 포즈로 무심한 관람객을 오히려 관람하고 있었다.
댓잎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버들잎인듯 하다. 저 무성한 하늘거림은 높은 곳에서 내려온 낮은 가지들이 땅을 바라보며 느끼는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왜 그토록 높이 성취한 것이 이토록 바닥으로 내려와 땅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가.
퇴계 이황은 능수버들처럼 아래로 내려온 매화를 보면서, 바닥에서 무릎을 꿇어 그 꽃을 올려보았다. 그래야 그 꽃의 진면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대상을 그 대상의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이, 퇴계 철학의 근본이기도 했다.
기꺼이 낮아지려고 하늘거리는 저 옥빛 버들 또한, 높아지려고만 했던 우리에게 말없이 무릎을 꿇어서 그 삶을 보여준다. 이제 삶의 의식을 반듯이 세우는 연륜(年輪)인 작가가, 그 두배의 나이에도 이루지 못하는 '겸(謙)'자 하나를 저기 바람소리로 뿌려놓으니 보는 이가 문득 부끄럽지 않겠는가. 나뭇잎 하나하나 그 귀여운 동세(動勢)를 한참 들여다 보았다. 옛 수묵화의 성취는, 형상과 빛에 연연하던 어리석음을 잠깐 주저앉히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나 장영은의 수묵은 빛의 소멸이 새로운 빛을 찾아내는 길임을 일깨워준다. 저 은행잎은 새로운 빛으로 영생을 얻었다.
오래 입고 있었던 실체를 벗음으로써, 그것이 아름다운 '결'로 이뤄진 존재임을 드러냈다, 수묵화는 비록 물이 그것을 감추긴 했으나, 붓의 결이 만들어내는 자취들이다. 결은 깊은 내면이며 가지런한 움직임이며 묵은 시간의 자취이며 누군가와 나란히 호응하는 화합과 평화의 굽이들이다. 목재 가구의 결에서 마당의 빗자루 자국까지 우리는 '결'에 익숙하고 '결'을 사랑해온 민족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부시게 오래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저 나뭇잎들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나뭇잎. 그 잔가지와 엽맥을 바느질로 표현한 새로움. 입체적이면서도 투박한 물성(物性)의 부각. 우리는 저 고사 직전의 나뭇잎에서 왜 위로와 평화를 얻는가. 저것이 겨울이다. 생명의 집착을 내려놓고 기꺼이 버려지는 것. 생명은 왜 이런 억울한 일을 해야 하는가. 그의 죽음이 다른 탄생을 부르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담담해지는 일이 성장이며 성숙이며 초월이다. 전시 제목인 '흐르는 계절'은, 가는 자의 슬픔이 아니라, 가는 자가 저 뒤에서 오는 봄을 돌아보며 잠깐 눈맞추는 보람과 기쁨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화는 이제, 청년세대가 이 만큼의 '수묵 변주'를 연주할 수 있는 높이와 깊이를 지니게 되었다. 놀라운 일이며 아름다운 질주이다. 시리도록 빛나는 겨울을, 이 구질구질한 장마철에 새뜻하게 맛보는 즐거움을 준 것은, 덤으로 안겨준 선물이라 하리라.
글, 이상국 (더뷰스 편집장, 〈추사에 미치다〉 저자) | 202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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