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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흔적
한낮의 빛이 방 안에 번지고 바람에 커튼이 흔들릴 때면, 나는 장영은의 작업을 떠올린다. 따뜻한 빛과 바람이 얇게 남는 그 순간은 그의 작업이 ‘그리기’보다 ‘남김’에 가깝다는 것을 드러낸다. 마르고 멈추고 다시 겹치는 시간 속에서 결이 생기고, 그 결이 주변의 고요를 조직한다. 이 정적은 반복이 만든 시간의 결과다.
그의 하루는 작품의 숨을 고르게 하는 준비에서 시작된다. 마른 뒤 다시 덧입히는 수행 같은 루틴 속에서 번짐은 ‘사이’에서 미세하게 조율되고, 그 간격이 표면의 호흡을 정한다. 여기에 재봉틀과 바느질이 교차하며 실의 선은 각도와 시선에 따라 잔잔한 반짝임을 남기고 하나의 리듬으로 모인다. 바늘은 붓의 자취 위에 선을 더해 빛을 걸어 둔다. 얇은 색층이 공기의 밀도처럼 포개지며 시간의 투명도를 만든다. 이 겹침은 시간의 두께로 응축되어 ‘남은 빛’으로 시야에 머문다. 작가의 이런 체득은 재료를 연구하다 발견한 우연이 아닌 그의 유년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의 영향 아래 책상 위엔 늘 물과 종이, 먹이 있었기에 재료는 기술보다 먼저 몸이 익힌 습관이었다. 그에게 수묵은 전통의 의무가 아니라 손끝의 일상이었고, 그 일상은 묵향이 스민 촉감에서 출발했다.
장영은의 작업에는 기다림이 전제된다. 말리는 동안 색의 온기와 밀도가 달라지고, 번짐은 멈추거나 더 스민다. 이 작업의 최소 단위는 ‘붓질’이 아니라 ‘말림–멈춤–겹침’의 한 사이클이다. 그렇게 남은 켜들이 서로 다른 시간값을 지닌 채 겹의 흔적을 이룬다. 얼룩의 경계, 바늘구멍과 매듭, 실이 만든 미세한 그림자는 한때의 행위를 가리키는 표식들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기보다 남기기를 택한다. 완결 대신 멈춤의 타이밍으로 표면의 시간 단위를 매기고, 그 위에서 감정은 물질로 한 번 응고됐다가 다시 여운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여운이 머문 표면은 관념에 앞서 몸을 먼저 건드린다. 가까이서 마주치는 섬세한 결,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실의 반사, 공기의 두께처럼 겹쳐진 얇은 색층—이 미세한 변화들은 설명보다 먼저 지각된다. 말하자면, 보는 일은 개념 해석보다 앞서 몸의 지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화면은 감정을 해명하기보다 감정이 되기 전의 느낌들을 질서 있게 배치한다. 이렇게 축적된 표면은 관람자의 개인적 기억을 깨운다. 새벽 공기, 창을 지난 빛, 비 뒤의 냄새 같은 기운이 화면의 여백·반복·층위와 맞물려 되살아나고, 관람자는 해설에 앞서 그 느낌을 몸으로 먼저 통과한다. 이러한 방식은 〈Light, Breath, Trace〉 2024~에서 자연의 자취를 섬세한 반사와 고르게 쌓인 층으로 다듬는 모습으로, 〈Trace of Trace〉 2025~ 에서는 제작 조건과 전개 공간 자체를 작업의 일부로 삼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전개를 이해하려면 그 이전의 축을 봐야 한다. 장영은의 궤적은 푸른 수묵과 농담의 수묵이 서로의 숨결을 나누며 확장해 온 흐름으로 읽힌다. 깊이를 거듭해 온 층위는 〈Pulse〉 2017~, 〈Eternally Blue〉 2019~, 그리고 〈Anthology〉 2021~에서 다져졌다. 이 흐름은 지금의 표면 아래 조용한 받침대가 되어 오늘의 감각을 지지한다.
올해 레지던시를 거치며 작가의 시선은 바다, 곧 물의 리듬으로 확장됐다. 빛의 되비침과 스밈, 마름과 젖음이 교차하는 움직임이 화면의 시간을 고르게 맞추고, 우연히 남는 물자국과 주름, 계절과 습도 차이가 만든 얼룩은 빛과 자연의 순환으로 모인다. 이는 레지던시에서 ‘의도된 우연’을 작업의 어법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그렇게 겹친 흔적 위에 〈Trace of Trace〉의 생각이 응축된다. 수묵·바느질·자수라는 기반을 지키되 조명으로도 표현의 폭을 넓힌다. 그러나 이 확장은 매체의 목록을 늘리는 외연이 아니라 화면의 밀도를 더하는 심화다. 따라서 장영은은 작업의 확장보다 심화를 본질로 삼는다. 조명의 각도와 밝기가 달라지면 실의 반사와 표면의 결이 달리 보이며 화면의 박자가 바뀐다. 예컨대 측면에서 낮게 비춘 빛 아래서는 실선의 반짝임과 실밥의 그림자가 먼저 떠오르고, 정면의 부드러운 확산광 아래에서는 먹의 스밈과 바탕의 미세한 물결이 전면으로 나온다. 벽에서 살짝 띄워 설치하면 관람자의 이동에 따라 표면의 반사선이 미세하게 이동하고, 면에 얹힌 자수가 주변 빛을 받아 작은 파동처럼 흔들린다. 때로 평면을 벽에서 떼어 공간으로 들여오면 관람자의 움직임과 빛의 변화가 함께 이동한다. 여러 층이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지점에서 면은 잔잔해지고, 마지막 한 겹이 내려앉으며 맥이 정돈된다. 이처럼 그의 작업 앞에서는 차분함이 먼저 온다. 서두르지 않는 숨, 쌓고 비우는 균형, 멈춰 지켜보는 태도. 이것은 분위기가 아니라 오랜 수련의 결과다. 빛은 숨처럼 흐르고, 결은 고요로 가라앉아, 끝내 기다림의 흔적으로 남는다.
김명희 (울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202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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